마이웨이 - [bluemind]얻은적은 김인권과 스케일, 잃은 것은 장동건과 스토리
작성자 정보
- 마이웨이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조회
-
목록
본문
[bluemind]얻은적은 김인권과 스케일, 잃은 것은 장동건과 스토리
마이웨이 마이 웨이
개인적 평점 : 8.0점
이번 영화의 줄거리는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 진영에서 발견된 한 한국인 포로. 강제규 감독은 S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 소련 독일까지 군복을 바꿔 입으며 전쟁 속을 헤쳐 나갔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접하게 됐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제 2차 세계대전이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두 남자의 거구한 여정을 그린 마이웨이 는 전작 태극기 휘날리며 와 마찬가지로 전쟁물의 외피를 둘러쓴 휴먼 드라마를 표방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전쟁 속에서 피어서는 우정을 이야기하려 노력한다.
일본 본토에서 경성으로 한 아이가 온다. 그리고 자기집 조선인 하인의 아들과 만난다. 어린 시절부터 애증을 키워온 두 남자는 조선 청년 준식(장동건)과 일본 청년 타츠오(오다기리 조)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달리는 걸 좋아했던 준식(장동건)과 타츠오(오다기리 조)는 조선과 일본을 대표하는 마라톤 선수로 성장한다. 1938년의 경성의 마라톤대회에서 그 두 남자가 맞붙는다. 올림픽 출전권이 달린 마라톤 경기에서 접전을 펼친 결과, 준식이 1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경기 관계자는 타츠오를 우승자로 발표한다. 이에 격분한 조선인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이 사건에 휘말린 준식과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다.
1년 후, 마라톤을 포기한 채 일본군 대위가 된 타츠오는 준식이 있는 부대로 온다. 소련의 탱크를 부셔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타츠오와 병사들은 오히려 소련군의 기습을 당해 포로가 된다.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지닌 채 전장의 소용돌이에 빠진 준식과 타츠오는 소련군에게 잡혀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히고, 소련군을 거쳐 독일군 병사가 된다. 그리고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 맞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강제규 감독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전쟁 장면은 탁월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특유의 핸드헬드로 긴박감을 조성한 뒤,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의 아수라장으로 초대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로 전쟁 영화의 노하우를 쌓은 감독은 세 번의 전쟁 장면을 각기 다른 콘셉트로 연출한다. 특히 전쟁터 한복판으로 들어간 카메라는, 탱크가 적군의 병사를 무자비하게 밟고 지나가는 모습과 일본군의 자살 특공대가 수류탄과 함께 소련군의 탱크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광경, 빗발치는 총탄과 수류탄에 피와 살이 튀는 광경을 와르르 쏟아놓으며 스펙터클함을 고조시킨다. 화려한 전투 장면을 보고 있으면, 전쟁 장면을 스펙터클하게 그리는 데 있어 현재 충무로에서 강제규 감독을 능가할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점에서 마이웨이 는 태극기 휘날리며 를 능가한다. 영화는 전쟁 장면의 규모와 스펙터클을 극대화함으로써 영화 내내 관객을 긴장시킨다.
화려한 영상과 달리 이야기는 전작들보다 퇴화된 듯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가 1,000만 관객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한국전쟁의 긴박한 분위기를 그리면서도 그 안에서 희생당하는 인간의 눈물겨운 고통과 회한을 유려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마이웨이 는 그 점에서 결정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 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 동력은 준식과 타츠오의 국적을 넘은 우정이다. 이들은 전쟁이란 어찌할 수 없는 사건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거듭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을 확인할 만한, 방점을 찍는 순간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이들은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억누른다. 특히 준식은 감정 동요 없이 짜증날 정도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간다. 그러다보니 준식이란 인물됨에 공감을 쉬이 얻기 어려웠다.
케럭터의 힘 또한 잘 느껴지지 않는다. 두 주인공은 소련군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면서 점점 동료애를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좀 약하다. 준식이 갑자기 타츠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부분이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상 가장 잘 이해돼야 하는 부분임에도 말이다. 타츠오가 자신의 모습을 소련군의 대장에게서 발견하는 부분도 오로지 오다기리 조의 감정으로만 표현됐다. 게다가 독일군이 되면 어느새 이들은 가장 절실한 동료로 둔갑한다. 독일군으로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은 부둥켜안으며 좋아하지만 그만큼의 감동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쟁터에서도 그렇다. 그 시대 최고의 마라토너라는 입지만으로 그는 무기 하나 없이도 준식을 찾아 전쟁터를 누빈다. 총알보다 빠르다고 믿어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해안의 함대의 포는 도망가고 있는 단 2명의 군사를 잡기위해 거대포를 마구 쏘아댄다. 군사 많은 곳을 때릴 포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전쟁영화는 늘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안전함에 많은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영화도 다르지 않다.
그나마 준식의 친구 종대(김인권)는 확실히 제 몫을 해냈다. ( 솔직히 영화 내내 장동건은 보이지 않고 김인권만 보인다. ) 특히 소련 포로수용소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반전이다. 어리바리했던 조선에서의 모습은 찾을 수 없이 변한다. 서서히 전쟁터에서 변해가는 모습의 잔인함을 몸소 보여준다. 생존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종대가 진정한 주인공인 이 장면이 어쩌면 마이웨이 가 걸어야 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변화하는 건 종대 뿐 아니다. 타츠오 역시 변화를 맞이한다. 타츠오는 부하들을 파리 목숨 취급하며 총알받이로 사용하는 러시아와 독일군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자신은 일본의 사명을 따르는 올바른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전쟁광에 불과했던 것이다. 천왕을 위해서라면 당장 할복이라도 할 것 같았던 타츠오는 러시아에 끌려가면 러시아 군복을 입고, 독일에 끌려가면 독일 군복을 입는 패배자로 내려앉는다.
전쟁 속에서 점차 인간성을 상실하는 종대와, 반대로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타츠오의 변화는 본질적으로 같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의 속성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전쟁의 모순을 의미한다. 양날의 칼처럼 이중적인 전쟁은 그 소용돌이 속에 뛰어든 인간 또한 양날의 칼이 되어감을 보여주며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운다. 마이웨이 의 진짜 메시지는 준식과 타츠오의 우정이 아닌, 묘하게 닮은 종대와 타츠오, 두 사람을 통한 전쟁의 참혹함이 아닐까 한다.
얼마 전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요집회’가 1001회 째를 맞이했다. 고령의 이들 할머니들은 한을 품은 채 세상과 이별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관련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사과커녕 보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의 2011년은 조선과 일본의 인간애를 그리기 이전에 반성을 요구해도 한참 모자란 시기다. 또한 김정일의 죽음으로 인해 북쪽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이웨이 는 힘든 싸움을 해 나갈 것 같다. 현 시점에서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우정은 너무나 거슬리는 소재일 것이다. P.S 영화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이은주씨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좋아했던 여배운데 하늘에선 행복하기를 빕니다. 함께 볼 만한 영화 : 진주만



마이웨이 마이 웨이
개인적 평점 : 8.0점
이번 영화의 줄거리는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 진영에서 발견된 한 한국인 포로. 강제규 감독은 S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 소련 독일까지 군복을 바꿔 입으며 전쟁 속을 헤쳐 나갔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접하게 됐고 깊은 감명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제 2차 세계대전이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두 남자의 거구한 여정을 그린 마이웨이 는 전작 태극기 휘날리며 와 마찬가지로 전쟁물의 외피를 둘러쓴 휴먼 드라마를 표방한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전쟁 속에서 피어서는 우정을 이야기하려 노력한다.
일본 본토에서 경성으로 한 아이가 온다. 그리고 자기집 조선인 하인의 아들과 만난다. 어린 시절부터 애증을 키워온 두 남자는 조선 청년 준식(장동건)과 일본 청년 타츠오(오다기리 조)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달리는 걸 좋아했던 준식(장동건)과 타츠오(오다기리 조)는 조선과 일본을 대표하는 마라톤 선수로 성장한다. 1938년의 경성의 마라톤대회에서 그 두 남자가 맞붙는다. 올림픽 출전권이 달린 마라톤 경기에서 접전을 펼친 결과, 준식이 1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경기 관계자는 타츠오를 우승자로 발표한다. 이에 격분한 조선인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이 사건에 휘말린 준식과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다.
1년 후, 마라톤을 포기한 채 일본군 대위가 된 타츠오는 준식이 있는 부대로 온다. 소련의 탱크를 부셔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타츠오와 병사들은 오히려 소련군의 기습을 당해 포로가 된다.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지닌 채 전장의 소용돌이에 빠진 준식과 타츠오는 소련군에게 잡혀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히고, 소련군을 거쳐 독일군 병사가 된다. 그리고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 맞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강제규 감독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전쟁 장면은 탁월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특유의 핸드헬드로 긴박감을 조성한 뒤,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는 전쟁의 아수라장으로 초대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로 전쟁 영화의 노하우를 쌓은 감독은 세 번의 전쟁 장면을 각기 다른 콘셉트로 연출한다. 특히 전쟁터 한복판으로 들어간 카메라는, 탱크가 적군의 병사를 무자비하게 밟고 지나가는 모습과 일본군의 자살 특공대가 수류탄과 함께 소련군의 탱크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광경, 빗발치는 총탄과 수류탄에 피와 살이 튀는 광경을 와르르 쏟아놓으며 스펙터클함을 고조시킨다. 화려한 전투 장면을 보고 있으면, 전쟁 장면을 스펙터클하게 그리는 데 있어 현재 충무로에서 강제규 감독을 능가할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점에서 마이웨이 는 태극기 휘날리며 를 능가한다. 영화는 전쟁 장면의 규모와 스펙터클을 극대화함으로써 영화 내내 관객을 긴장시킨다.
화려한 영상과 달리 이야기는 전작들보다 퇴화된 듯하다. 태극기 휘날리며 가 1,000만 관객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건, 한국전쟁의 긴박한 분위기를 그리면서도 그 안에서 희생당하는 인간의 눈물겨운 고통과 회한을 유려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마이웨이 는 그 점에서 결정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 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 동력은 준식과 타츠오의 국적을 넘은 우정이다. 이들은 전쟁이란 어찌할 수 없는 사건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거듭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을 확인할 만한, 방점을 찍는 순간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이들은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억누른다. 특히 준식은 감정 동요 없이 짜증날 정도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간다. 그러다보니 준식이란 인물됨에 공감을 쉬이 얻기 어려웠다.
케럭터의 힘 또한 잘 느껴지지 않는다. 두 주인공은 소련군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면서 점점 동료애를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좀 약하다. 준식이 갑자기 타츠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부분이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상 가장 잘 이해돼야 하는 부분임에도 말이다. 타츠오가 자신의 모습을 소련군의 대장에게서 발견하는 부분도 오로지 오다기리 조의 감정으로만 표현됐다. 게다가 독일군이 되면 어느새 이들은 가장 절실한 동료로 둔갑한다. 독일군으로 다시 만났을 때 이들은 부둥켜안으며 좋아하지만 그만큼의 감동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쟁터에서도 그렇다. 그 시대 최고의 마라토너라는 입지만으로 그는 무기 하나 없이도 준식을 찾아 전쟁터를 누빈다. 총알보다 빠르다고 믿어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해안의 함대의 포는 도망가고 있는 단 2명의 군사를 잡기위해 거대포를 마구 쏘아댄다. 군사 많은 곳을 때릴 포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전쟁영화는 늘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안전함에 많은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영화도 다르지 않다.
그나마 준식의 친구 종대(김인권)는 확실히 제 몫을 해냈다. ( 솔직히 영화 내내 장동건은 보이지 않고 김인권만 보인다. ) 특히 소련 포로수용소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반전이다. 어리바리했던 조선에서의 모습은 찾을 수 없이 변한다. 서서히 전쟁터에서 변해가는 모습의 잔인함을 몸소 보여준다. 생존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종대가 진정한 주인공인 이 장면이 어쩌면 마이웨이 가 걸어야 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변화하는 건 종대 뿐 아니다. 타츠오 역시 변화를 맞이한다. 타츠오는 부하들을 파리 목숨 취급하며 총알받이로 사용하는 러시아와 독일군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자신은 일본의 사명을 따르는 올바른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전쟁광에 불과했던 것이다. 천왕을 위해서라면 당장 할복이라도 할 것 같았던 타츠오는 러시아에 끌려가면 러시아 군복을 입고, 독일에 끌려가면 독일 군복을 입는 패배자로 내려앉는다.
전쟁 속에서 점차 인간성을 상실하는 종대와, 반대로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타츠오의 변화는 본질적으로 같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의 속성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전쟁의 모순을 의미한다. 양날의 칼처럼 이중적인 전쟁은 그 소용돌이 속에 뛰어든 인간 또한 양날의 칼이 되어감을 보여주며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운다. 마이웨이 의 진짜 메시지는 준식과 타츠오의 우정이 아닌, 묘하게 닮은 종대와 타츠오, 두 사람을 통한 전쟁의 참혹함이 아닐까 한다.
얼마 전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요집회’가 1001회 째를 맞이했다. 고령의 이들 할머니들은 한을 품은 채 세상과 이별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관련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사과커녕 보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의 2011년은 조선과 일본의 인간애를 그리기 이전에 반성을 요구해도 한참 모자란 시기다. 또한 김정일의 죽음으로 인해 북쪽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이웨이 는 힘든 싸움을 해 나갈 것 같다. 현 시점에서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우정은 너무나 거슬리는 소재일 것이다. P.S 영화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이은주씨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좋아했던 여배운데 하늘에선 행복하기를 빕니다. 함께 볼 만한 영화 : 진주만
로그인 후 마이웨이에 대한 FAQ를 등록해 주세요.
마이웨이 관련 동영상




관련자료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