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 하녀(2010) : 자식마저도 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린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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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2010) : 자식마저도 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린 어머니
하녀 하녀 감독 임상수 출연 전도연, 이정재, 윤여정, 서우 개봉 2010 대한민국 리뷰보기 신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보살필 수 없기에 세상으로 내려 보낸 존재가 바로 어머니라는 누군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식에게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은 신에 비유될 만큼 절대적이다. 그리고 이 절대적인 사랑에는 어머니, 당신의 희생과 인내가 뒤따른다. 이러한 헌신은 자식이 세상에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열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몸 속에 품어 키우고, 길게는 하루가 넘는 출산의 고통을 견뎌내며 자식을 낳는다. 하지만 이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출산 속에서도 태어난 자식의 얼굴을 보면 모든 아픔을 잊고 미소를 짓는 어머니, 바로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세상 대부분의 자식들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머니라는 최초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 속에서 안식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김기영 감독의 원작 하녀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리메이크한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숭고한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를 왜곡하여 표현한다. 이러한 왜곡은 하녀(이하 모두 임상수 감독의 영화)가 재미가 없진 않은데 불쾌한(씨네21 786호 임상수 감독 인터뷰 중) 영화로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녀속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계급을 가지고 있고, 그 계급은 집주인 훈(이정재)을 정점으로 그의 아내 해라(서우)와 해라의 어머니(박지영) 그리고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과 젊은 하녀 은이(전도연)로 이어지는 수직관계로 나타난다. 영화 속 인물들의 계급이 세분화 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영화 속에 존재하는 계급은 단 둘이다. 그 두 계급은 집주인 훈과 훈의 하녀들이다. 막대한 권력과 부를 가진 훈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의 정해진 계급에는 관계없이 모두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이러한 훈의 시각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의 초반부 화장대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해라와, 그녀가 사용한 욕실을 청소하는 은이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한 상황 속에 존재하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두 여자의 모습이지만, 그 가운데 선 훈에게는 그저 서로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존재로만 비춰진다. 그렇기에 훈은 해라만이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던 와인을 은이에게도 건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도입한 사회학적 용어로 무산계급 노동자를 지칭하는 프롤레타리아는 그 어원을 고대 로마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로마인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자식-프롤레스(proles)-밖에 없는 최하위 계급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 즉 오늘 날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다. 이런 고대 로마의 프롤레타리아의 모습들이 하녀속에서도 나타난다. 그녀들이 가진 부의 차이를 배제하고 해라와 은이를 비교했을 때, 둘의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배가 부른 여자와 배가 부르지 못한 여자라는 점이다. 이는 해라만이 훈이라는 ‘절대적 계급’에 의해 다른 계급성들이 상실된 현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최하위 계급을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해라는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삶을 살고 있는 여자다. 힘들게 돈을 벌어 오지 않아도 되고, 집안일을 할 필요도 없다. 느지막이 일어나 고용인들이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집으로 찾아오는 개인 트레이너와 운동을 하고, 푹신한 침대에 편안히 기대 책을 읽는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은 프랑스 여성 작가 보부아르의 『제2의 性』이다. 남성에 의해 규정되어온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면에서 해라의 삶은 보부아르가 이야기한 여성의 삶과 부합하는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모든 삶은 남편인 훈에 의존한 결과라는 점에서 『제2의 性』이 이야기하는 여성의 모습과는 모순된다. 겉으로 화려하고 대등한 결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하녀의 등장인물 중 누구보다도 훈에게 충실한 하녀는 바로 해라다. 이는 둘이 여행지에서 잠자리를 갖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침대 위에 편안히 누워있는 훈의 위에서 여성상위로 성관계를 가지던 해라는 임신한 몸 때문에 더 이상 행위를 이어가기가 힘들어지자 스스럼없이 훈의 다리 아래 엎드려 구강성교를 한다. 서로가 성적 만족감을 얻기 위한 부부관계가 아닌, 해라에게는 훈에게 성적쾌감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해라는 여러 번 아이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다. 그녀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쌍둥이를 자연분만 하려는 이유 역시 더 많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이다. 자식이야말로 훈이 지배하는 계급사회 속에서 해라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부여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의 하녀에게 있어 자식은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대상이 아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는 해라뿐만 아니라 해라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그녀들은 훈의 바람으로 인해 은이의 뱃속에 아이가 생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훈에게는 자신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조차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해라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두고 바람난 사위에 대해 조금의 화도 내지 않는다. 그녀는 분노하는 해라에게 웃으며 잘난 남편의 바람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 말 할 뿐이다. 이에 반해 은이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그녀들의 응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훈이 은이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은이의 뱃속에 훈의 아이가 잉태되었다는 점이다. 은이가 훈의 아이를 낳음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지위를 획득하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아 갈까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2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그냥 바라만보고, 임산부에게 극약이 든 약을 먹이는 잔인한 행동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실행하도록 만든다.
늙은 하녀 병식과 젊은 하녀 은이는 세상의 ‘아.더.메.치’ 함을 온 몸으로 느끼지만 그것을 참아가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아.더.메.치’ 함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녀들은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세상에 찍 소리를 낸다. 은이는 2층에서 내던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병식은 평생을 충성해왔던 고용주 가족에게 처음으로 반항을 하고 일을 그만둔다. 그녀들의 행동이 결국은 찍 소리조차 되지 못했다는 건 동일하지만, 한 여자는 목숨을 던졌고 한 여자는 그저 직업을 잃었을 뿐이다. 이는 결국 아이를 갖지 못했던 은이와 인간 승리로 아들을 검사로 만든 병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은이의 마지막 모습이 더욱 안타까운 건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했음에도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령



하녀 하녀 감독 임상수 출연 전도연, 이정재, 윤여정, 서우 개봉 2010 대한민국 리뷰보기 신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보살필 수 없기에 세상으로 내려 보낸 존재가 바로 어머니라는 누군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식에게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은 신에 비유될 만큼 절대적이다. 그리고 이 절대적인 사랑에는 어머니, 당신의 희생과 인내가 뒤따른다. 이러한 헌신은 자식이 세상에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열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몸 속에 품어 키우고, 길게는 하루가 넘는 출산의 고통을 견뎌내며 자식을 낳는다. 하지만 이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출산 속에서도 태어난 자식의 얼굴을 보면 모든 아픔을 잊고 미소를 짓는 어머니, 바로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세상 대부분의 자식들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머니라는 최초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 속에서 안식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김기영 감독의 원작 하녀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리메이크한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숭고한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를 왜곡하여 표현한다. 이러한 왜곡은 하녀(이하 모두 임상수 감독의 영화)가 재미가 없진 않은데 불쾌한(씨네21 786호 임상수 감독 인터뷰 중) 영화로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녀속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계급을 가지고 있고, 그 계급은 집주인 훈(이정재)을 정점으로 그의 아내 해라(서우)와 해라의 어머니(박지영) 그리고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과 젊은 하녀 은이(전도연)로 이어지는 수직관계로 나타난다. 영화 속 인물들의 계급이 세분화 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영화 속에 존재하는 계급은 단 둘이다. 그 두 계급은 집주인 훈과 훈의 하녀들이다. 막대한 권력과 부를 가진 훈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의 정해진 계급에는 관계없이 모두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이러한 훈의 시각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의 초반부 화장대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해라와, 그녀가 사용한 욕실을 청소하는 은이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한 상황 속에 존재하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두 여자의 모습이지만, 그 가운데 선 훈에게는 그저 서로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존재로만 비춰진다. 그렇기에 훈은 해라만이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던 와인을 은이에게도 건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도입한 사회학적 용어로 무산계급 노동자를 지칭하는 프롤레타리아는 그 어원을 고대 로마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로마인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자식-프롤레스(proles)-밖에 없는 최하위 계급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 즉 오늘 날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다. 이런 고대 로마의 프롤레타리아의 모습들이 하녀속에서도 나타난다. 그녀들이 가진 부의 차이를 배제하고 해라와 은이를 비교했을 때, 둘의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배가 부른 여자와 배가 부르지 못한 여자라는 점이다. 이는 해라만이 훈이라는 ‘절대적 계급’에 의해 다른 계급성들이 상실된 현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최하위 계급을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해라는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삶을 살고 있는 여자다. 힘들게 돈을 벌어 오지 않아도 되고, 집안일을 할 필요도 없다. 느지막이 일어나 고용인들이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집으로 찾아오는 개인 트레이너와 운동을 하고, 푹신한 침대에 편안히 기대 책을 읽는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은 프랑스 여성 작가 보부아르의 『제2의 性』이다. 남성에 의해 규정되어온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희생하는 삶에서 벗어났다는 면에서 해라의 삶은 보부아르가 이야기한 여성의 삶과 부합하는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모든 삶은 남편인 훈에 의존한 결과라는 점에서 『제2의 性』이 이야기하는 여성의 모습과는 모순된다. 겉으로 화려하고 대등한 결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하녀의 등장인물 중 누구보다도 훈에게 충실한 하녀는 바로 해라다. 이는 둘이 여행지에서 잠자리를 갖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침대 위에 편안히 누워있는 훈의 위에서 여성상위로 성관계를 가지던 해라는 임신한 몸 때문에 더 이상 행위를 이어가기가 힘들어지자 스스럼없이 훈의 다리 아래 엎드려 구강성교를 한다. 서로가 성적 만족감을 얻기 위한 부부관계가 아닌, 해라에게는 훈에게 성적쾌감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해라는 여러 번 아이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다. 그녀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쌍둥이를 자연분만 하려는 이유 역시 더 많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이다. 자식이야말로 훈이 지배하는 계급사회 속에서 해라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부여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의 하녀에게 있어 자식은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대상이 아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는 해라뿐만 아니라 해라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그녀들은 훈의 바람으로 인해 은이의 뱃속에 아이가 생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훈에게는 자신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조차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해라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두고 바람난 사위에 대해 조금의 화도 내지 않는다. 그녀는 분노하는 해라에게 웃으며 잘난 남편의 바람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 말 할 뿐이다. 이에 반해 은이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그녀들의 응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훈이 은이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은이의 뱃속에 훈의 아이가 잉태되었다는 점이다. 은이가 훈의 아이를 낳음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지위를 획득하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아 갈까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2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그냥 바라만보고, 임산부에게 극약이 든 약을 먹이는 잔인한 행동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실행하도록 만든다.
늙은 하녀 병식과 젊은 하녀 은이는 세상의 ‘아.더.메.치’ 함을 온 몸으로 느끼지만 그것을 참아가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아.더.메.치’ 함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녀들은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세상에 찍 소리를 낸다. 은이는 2층에서 내던진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병식은 평생을 충성해왔던 고용주 가족에게 처음으로 반항을 하고 일을 그만둔다. 그녀들의 행동이 결국은 찍 소리조차 되지 못했다는 건 동일하지만, 한 여자는 목숨을 던졌고 한 여자는 그저 직업을 잃었을 뿐이다. 이는 결국 아이를 갖지 못했던 은이와 인간 승리로 아들을 검사로 만든 병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은이의 마지막 모습이 더욱 안타까운 건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했음에도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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