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 그리스 비극의 21세기적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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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의 21세기적 변주
그을린 사랑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신탁이나 저주로부터 시작된다. 김상봉 선생님에 의하자면, 그리스적 영웅이란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영웅들은 신탁 또는 저주라는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지만, 영웅도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신탁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한계를 타고난 인간으로서는 그 숙명을 거스를 수 없다. 그리스 비극의 비극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기원전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연작 비극인 오이디푸스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 서사의 21세기적 변주를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주인공 남매인 시몬과 잔느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겨다니는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운명을 닮아 있으며, 그들의 어머니이자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인 나왈에게는 비극적 운명에 휘둘린 가엾은 이오카스테가 겹쳐진다.저주받은 운명으로 태어난 아기가 버려지는 장면으로부터 오이디푸스의 서사가 시작되듯이, 이 영화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나왈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아기를 떠나보내면서 시작된다. 태어나자마자 살해될 위기에 처했던 쌍둥이 남매가 극적으로 구출되는 장면은,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를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한 심부름꾼의 에피소드와 고유진동수가 일치한다.그리고 오이디푸스가 피해가지 못했던 저주의 예언이 결국은 제 눈을 찌르는 운명의 칼날이 되어 돌아왔듯이, 21세기 버전의 변주인 이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알아버린 어머니 나왈이 실어증에 걸려서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장님이 되는 선택을 함으로써 진실로부터 도피를 했던 반면에, 어머니인 나왈은 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진실이라는 건 때로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이기도 하다.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겨다니던 오레스테스에게 아테네의 신전이 무죄를 선고하여 죄를 사하여 주었듯이, 이 영화에서는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인 어머니 스스로가 심판관을 자처한다. 아테네의 신전이 가부동수를 이루어 오레스테스의 무죄를 이끌어냈다면, 나왈은 비극의 한복판으로 각각 한 통 씩의 편지를 동등하게 남긴다. 운명의 어머니는 그 누구의 죄도 묻지 않는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연극론에 의하자면, 연극은 몰입과 카타르시스의 무대예술이고, 이 영화는 용서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이다. 화해라는 건 어쩌면 카타르시스의 변형된 형태일지도 모른다.장님이 된 운명의 죄인 오이디푸스의 손을 잡고 테베를 떠나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 바로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이다. 오이디푸스의 사후 장례를 금지한 왕의 칙령을 어기고 제 목숨을 걸어 아비의 무덤을 만들어주는 것도 안티고네이다. 이 영화에서는 쌍둥이중 딸인 잔느가 안티고네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남매인 시몬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유언을 집행하는 인물이다. 어머니에게서 시작된 비극은 딸에게로 와서 비로소 화해를 이룬다.훌륭한 영화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마냥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지만은 않다. 내러티브를 가진 예술은 아무리 그래도 이야기의 힘이 우선일텐데, 이 영화는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디테일에 있어서 다소 불친절하고 모호하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감독이 디테일과 보편성 사이에서 갈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감독은 결과적으로 보편성의 획득에 노력을 들인 것 같은데, 이 부분에서는 감독의 선택에 동의할 수가 없다. 켄 로치의 영화를 반례로 들자면, 니카라과 내전이라는 매우 디테일한 소재로 만든 칼라송이라는 작품이 인류애적 메시지라는 보편성의 획득에 실패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디테일과 보편성이라는 변수는 서로 음함수의 관계에 있는 항목이 아니다.그리스 비극이 강하게 연상되는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연극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 영화의 원작은 연극이라고 한다. 최근에 보았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결말이었는데, 영화보다는 무대를 통해서 접하는 게 훨씬 더 충격이 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은막의 스크린은 소름끼치는 진실의 강도를 전달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누군가 제작비를 대준다면 직접 번역을 해서 무대에 올리고 싶은 생각도 있다. 연극 제작자 여러분 연락 주세요. 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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