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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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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감독 이준익 출연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 개봉 2017 한국 리뷰보기 1919년 기미년 3월 1일, 3·1운동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본에서는 간토대지진이 일어났다. 마치 조선의 민중들의 울분을 하늘이라도 알았다는듯일어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는 일본 정부의 대응이었는데, 이 영화는바야흐로 그때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박열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 몇몇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불령단이라는 것을 조직했다. 실제로 박열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미한 결과에 대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하겠다는 사명감이 막중한 것으로 보였다. 실제 상하이로부터 폭탄을 입수해서 천황의 황태자를 암살할 계획을 짜게 된다. 하지만 동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일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를 맞추어 간토대지진이 일어났다. 일본 내 여론은 악화되어 정부 관료들은 민중들의 폭동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운 것이 조선인들의 폭동과 방화, 우물에 독을 탔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를 계엄선포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문명국이라는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문맹 조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인은 대규모 학살을 당하고 만다. 역사의 그 이름, 관동대지진학살사건이 그것이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관동대지진학살사건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영화 속의 학살은 실제 그것보다는 약했겠지만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기에 너무나도 흉악한 사건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물론일본 내 거주민 조선인들을 6,000여명 이상 학살했다. 역사기록에는 시신도 찾지 못한 시민들이 무척이나 많았다하니, 실제로는 그 숫자 이상일 것이었다.
박열은도망가지 않고 경찰들에게 잡히기로 결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작은 희생으로 조선인을 대변하고 일제 강점을 온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듯하다. 이를 눈치챈동거인이자사상과 영혼의 동반자 후미코와친구들이 함께 투옥된다. 하지만 결국 박열과 후미코가 모든 사건을 뒤집어 쓰기로 했고, 친구들은 석방된다.
조선에서도 이 사건이 이슈가 되고 기자가 찾아온다. 친구들은 변호사를 물색하고 배정해서 박열과 후미코의 구명활동을 펼친다. 친구들과 기자 등의 관심이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이미 각본이 짜여진 이 사건의 판결은 사형이었다. 그런 와중에 박열과 후미코의 대사가 너무나도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어조로 민중을 대변하는데, 그 생생한 음성이 아직도 귀에 얼얼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박열과 후미코의 사랑이야기가 백미였다. 독립 운동도 독립 운동이지만 개인사에서 멋진 사랑의 동반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사상도 그들의투쟁사도그렇게 결연에 차있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 사랑이 국가에 대한 애국보다 우선적인 감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사랑이야기와 민족과 민중을 위한 개인의 투쟁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솟구치는 것이 전혀의아한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후미코는 살해당하고, 박열은 22년 2개월 복역후 석방이 되었다. 재판 선고는 사형이었지만, 천황의 감형 조치로 죽음으로 투쟁을 마무리 하려 했던 두 사람의 결연한 의지를 무참치 짓밟았던 것이었다. 그들의 공로는 건국 후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1989년에서야 비로소 대한민국으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았다.무참히 쓰러져간 동포들. 국가 잃은 설움을 속후련하게 보상받지 못한 시대의 운명적 시민들.섣불리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가슴 한 번 펴지 못하고, 말 한 번 제대로 못한 우리 민족의 선조들. 모두가 우리나라 국민이었으며 그 중특히 빛난 올바른 사상과 올바른 언행을제대로 보인 박열. 일본인 후미코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국가적 존재와 국민적 존엄성을드높이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그 두 분과 동시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하신 선열과 능욕의 세월을묵묵히 잘 견디신 선조들을 위해 감사와 눈물의 묵념을올립니다. 다음 생애는 부디 행복하시길 타미쌤



박열
박열 감독 이준익 출연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 개봉 2017 한국 리뷰보기 1919년 기미년 3월 1일, 3·1운동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본에서는 간토대지진이 일어났다. 마치 조선의 민중들의 울분을 하늘이라도 알았다는듯일어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는 일본 정부의 대응이었는데, 이 영화는바야흐로 그때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박열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 몇몇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불령단이라는 것을 조직했다. 실제로 박열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미한 결과에 대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하겠다는 사명감이 막중한 것으로 보였다. 실제 상하이로부터 폭탄을 입수해서 천황의 황태자를 암살할 계획을 짜게 된다. 하지만 동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일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를 맞추어 간토대지진이 일어났다. 일본 내 여론은 악화되어 정부 관료들은 민중들의 폭동을 우려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세운 것이 조선인들의 폭동과 방화, 우물에 독을 탔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를 계엄선포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문명국이라는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문맹 조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인은 대규모 학살을 당하고 만다. 역사의 그 이름, 관동대지진학살사건이 그것이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관동대지진학살사건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영화 속의 학살은 실제 그것보다는 약했겠지만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기에 너무나도 흉악한 사건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물론일본 내 거주민 조선인들을 6,000여명 이상 학살했다. 역사기록에는 시신도 찾지 못한 시민들이 무척이나 많았다하니, 실제로는 그 숫자 이상일 것이었다.
박열은도망가지 않고 경찰들에게 잡히기로 결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작은 희생으로 조선인을 대변하고 일제 강점을 온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듯하다. 이를 눈치챈동거인이자사상과 영혼의 동반자 후미코와친구들이 함께 투옥된다. 하지만 결국 박열과 후미코가 모든 사건을 뒤집어 쓰기로 했고, 친구들은 석방된다.
조선에서도 이 사건이 이슈가 되고 기자가 찾아온다. 친구들은 변호사를 물색하고 배정해서 박열과 후미코의 구명활동을 펼친다. 친구들과 기자 등의 관심이 있었지만, 조직적으로 이미 각본이 짜여진 이 사건의 판결은 사형이었다. 그런 와중에 박열과 후미코의 대사가 너무나도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어조로 민중을 대변하는데, 그 생생한 음성이 아직도 귀에 얼얼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박열과 후미코의 사랑이야기가 백미였다. 독립 운동도 독립 운동이지만 개인사에서 멋진 사랑의 동반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사상도 그들의투쟁사도그렇게 결연에 차있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 사랑이 국가에 대한 애국보다 우선적인 감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의 사랑이야기와 민족과 민중을 위한 개인의 투쟁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솟구치는 것이 전혀의아한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후미코는 살해당하고, 박열은 22년 2개월 복역후 석방이 되었다. 재판 선고는 사형이었지만, 천황의 감형 조치로 죽음으로 투쟁을 마무리 하려 했던 두 사람의 결연한 의지를 무참치 짓밟았던 것이었다. 그들의 공로는 건국 후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가, 1989년에서야 비로소 대한민국으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았다.무참히 쓰러져간 동포들. 국가 잃은 설움을 속후련하게 보상받지 못한 시대의 운명적 시민들.섣불리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가슴 한 번 펴지 못하고, 말 한 번 제대로 못한 우리 민족의 선조들. 모두가 우리나라 국민이었으며 그 중특히 빛난 올바른 사상과 올바른 언행을제대로 보인 박열. 일본인 후미코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국가적 존재와 국민적 존엄성을드높이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그 두 분과 동시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하신 선열과 능욕의 세월을묵묵히 잘 견디신 선조들을 위해 감사와 눈물의 묵념을올립니다. 다음 생애는 부디 행복하시길 타미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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