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블루스 - 소울 오브 맨 - #195.더 블루스-soul of a man (빔 벤더스 2003)- Thanks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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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더 블루스-soul of a man (빔 벤더스 2003)- Thanks Blues.
더 블루스 - 소울 오브 맨 아주 오랜 세월 동안,그러니까 내 지나온 삶의 대부분 동안,극장은 내게 거의 신전이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여동생을 다른 집에 맡겨두고 나만 데리고서 러브 스토리를 보러 갔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한밤중 흑백 텔레비젼에서빛나는 광선과 함께 쏟아지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동굴 속 같은이불 안에서 훔쳐보던 어느 날,어머니가 나와 여동생의 손을 잡고 메리 포핀스를 보러 갔던 어느 날,드디어 부모님 품을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써스페리아와 로보트 태권 V 그리고 마루치 아라치를 보았던 어느 날..그리고 또다른 숱한 어느 날들 동안,스크린이 있고 빛이 있고 이야기와 사람들이 있는 극장은 내게 완벽한 어떤 세계에 다름 아니었다.아마 죽기 전에 생각나게 될 것 열 가지 중 하나에 포함될 것이다.. 그 어떤 도시에 살게 되더라도,그러니까 유학 기간이나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서 일하게 되었던 그 어떤 날들에라도,내가 가장 먼저했던 것은 그 도시의 레코드 샵에 가서 폴 사이먼의 음반을 사는 것과,영화관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극장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영화를 보는 방법,영화를 보는 경로 자체가 달라지게 되었다.비디오 데크가 나왔고 이어서 dvd가 등장했고 좀 지나자 영화는 컴퓨터 파일의 형태로 변화하여 집 안에서 다운로드 받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나는 VTR도 DVD도 영화 파일도 좋아하지 않았다.그것은 어쩐지 가짜 (FAKE)같았다.나는 영화를 보는 것이란,영화관 앞에 까지 가는 여러과정들,영화 티켓을 사는 순간,마실 물이나씹을팝콘,같이 보았던 사람 또 그 사람과의 관계,영화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두근거림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지막순간과 엔딩 크레딧까지,,그 모든 것이 포함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즉 극장까지 가서 거대한 스크린을 눈 앞에 두어야 비로소 영화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따라서 집 안에서 조그만 기계를 통해 보는 영화는 어쩐지 영화 같지가 않았다.나는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야말로 기독교로 치면 일종의 퀘이커 교도-무교회주의의 신앙 형태라고 생각했으며,교회-성전-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만이 영화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또 어느 순간,삶이 녹록치 않아졌다.영화를 볼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해졌다.형편없이 바빠졌고 싱글 라이프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나는 가족들에게 내 시간을 배분해야 했다.게다가 극장 역시 예전의 극장이 아니었다.극장들은 거의 모조리 고층 아파트 같은 멀티 플렉스로 변해버렸다.멀티 플렉스의 존재 형태는 예전의 단관 극장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그것은 마치 성 베드로 성당과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차이와도 비슷했다.멀티 플렉스에는 시간과 사람들의 숨결이 없었다.그곳은 그저 극대화된 엔터테이너들의 백화점,그리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시간과 공간으로 가득한 삼성의 에버랜드 같은 곳이었다.게다가 멀티 플렉스를 지배하는 자본은 철저하게 그 자신의 논리에 따라 영화를 제공했다.자본이 많이 투자된 영화가 스크린과 상영 기간을 확보했다.반면에 흥행 가능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은 멀티 플렉스라는 공간에서 찾아보기 조차 어렵게 되었다.(심지어 최근엔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서도 그들은 영화를 가려낸다.다이빙 벨에게 스크린을 내어주지 않는 한국의 영화자본들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천민자본이라는 말이 입 안에 맴돌게 된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가 어느 순간 상영작 리스트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해졌고 어떤 영화들은 아예 상영의 기회 조차 원천봉쇄 당하게 되었다.그런 일이 여러번 반복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극장지상주의를 포기하게 되었다.DVD와 컴퓨터 파일에 나를 적응시키려 애를 썼다.DVD까지는 그래도 괜챦았지만 파일로 된 영화들엔 정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간단히 말해서 영화가 아닌 것 같았다.그러나 결국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아서 판다..나는 어느 순간 보고 싶은 영화를 찾아서 인터넷의 세계를 헤매게 되었다. 특히 야간 당직 - 이젠 거의 당직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의 밤,나는 영화 제목 하나를 들고 인터넷의 바다를 헤쳐나갔고 거기서 보물 같은 영화를 발견해서,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했던 여러밤들을 보내게 되었다.의외의 영화 파일을 발견하는 경험이 주는 즐거움 역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보았던 첫 파일 영화가 바로 오늘 얘기할 영화 더 블루스 :소울 오브 맨이었다.마틴 스콜세지 제작,빔 벤더스가 감독,그리고 블루스 음악을 다룬 다큐멘터리.당연히 달려가서 보아야 할 영화였다.하지만 이 영화는 아예 개봉 소식 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결국 내겐 소문으로만 남게 된 영화였다.결국 혹시나 하는 심정에 인터넷을 뒤졌고 결국 찾아내고야 말았다.그리고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영화는 미국의 고유한 음악 쟝르 블루스에 관한 영화다.음악에 일가견이 있는,언제나 자신의 영화에 일급의 영화 음악을 새겨넣을 줄 아는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가 미국의 방송 네트워크 PBS 와 함께 기획한 블루스에 관한 연작 다큐멘터리 중 하나다.스콜세지는 블루스에 관한 영화 7편을 연이어 제작하는데,그 일곱 편의 영화는 다음과 같다. 1.오늘의 영화 빔 벤더스의 소울 오브 맨 The Soul of A Man
2.마틴 스콜세지 본인이 감독한고향에 가고 싶다 Feel like Going Home- 이 영화는 블루스의 서브쟝르 중에서도 델타 블루스를 다룬 영화인데 델타 블루스의 고향 미시시피를 거쳐 아프리카까지 찾아가서 블루스의 본류,블루스의 고향을 찾는다.
3.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피아노 블루스 Piano Blues- 이스트우드 역시 알려진 재즈광,피아노 블루스를 다룬 이 영화에서 그는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다.참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영화다.
4.마이크 피기스의 레드, 화이트 그리고 블루스 Red, White and Blues-마이크 피기스 역시 잊을 수 없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스팅과 돈 헨리 등을 통해 우수어린 음악을 선사했었다.이 영화에서 그는 흔히 말하는 1960년대 초반의 British invasion 당시 rock으로 재해석된 블루스를 다룬다.즉 미국 팝 음악의 뿌리를 캐낸다.
5.마크 레빈의 아버지와 아들 Godfather and Son- 마크 레빈은 시카고 블루스를 다룬다.사실 시카고 블루스가 없었다면 미국의 록 음악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영화는 그에 이어서 힙합 등의 현대적인 음악에 서려 있는 블루스와 록의 이미지들까지 탐구한다.
6.찰스 버넷의 악마의 불꽃에 휩싸여 Warning By The Devil’s Fire - 가스펠과 블루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영화인데,엄청나게 흥미로운 묘사들이 속출한다.
7.리처드 피어스의 멤피스로 가는 길 The Road To Memphis-초기 블루스와 델타 그리고 시카고 블루스는 결국 멤피스로 향하게 된다.멤피스에서,블루스는 현대적인 형태로 재탄생된다.리처드 피어스는 B.B.킹의 음악과 삶을 쫓아가며 영화를 진행시킨다.. 이 영화들을 죄다 다운로드받은 나는,그 주 내내 매일 밤 블루스 음악에 젖어 시간을 보냈다.극장이 아니어도 좋았다.다른 사람과 함께가 아닌 것이 음악을 느끼기엔 더 유리했다.그리고 블루스가 왜 블루스인지를 생각했다.. 그 중 빔 벤더스가 만든 첫 영화 소울 오브 어 맨은 미국 블루스 초기의 세 뮤지션을 다룬다. 블라인드 윌리 존슨 (Blind Willie Johnson) 스킵 제임스 (Skip James) 그리고 제이 비 르누아르 (J.B. Renoir). 벤더스는 영화적 트릭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 그는 기록 화면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블라인드 윌리 존슨과 스킵 제임스의 경우에 대역을 사용하여 촬영했고,처음에 등장하는 윌리 존슨이 나머지 두 사람을 소개하는 척 한다.이때 블라인드 윌리 존슨의 목소리를 내레이션 하는 이는 로렌스 피시번이다- 그들의 삶과 내면을 조명하고,이 세 사람의 노래를 현대의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하게 하여 오마쥬를 바친다.(즉 후대의 뮤지션들이 그들의 곡을 영화 안에서 연주한다) 왜 하필 빔 벤더스는이 세 사람의 뮤지션을 골라냈을까? 핵심은 어쩌면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수많은 초기 블루스 뮤지션들 중 하필 그들을 골라낸 이유야말로 이 영화의 메세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먼저 블라인드 윌리 존슨.


그는 이름만 블라인드가 아니라 실제로 맹인이다.그것도 아버지와 싸우던 새엄마가 홧김에 아이의 눈에 양잿물을 뿌리는 통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는 거의 평생을 걸인처럼 떠돌며 구걸인생을 살았고 결국 가난 속에서 죽었다.그는 아내와 함께 미국 남부를 돌며,정말 깡통 하나 앞에 두고 블루스에 기반한 노래를 기타 반주 하나에 맞추어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슬라이드 기타의 명인이다- 노래를 불렀고 그의 노래들은 후대의 뮤지션들의 리메이크를 통해 레전드의 반열에 오른다. 가령 이런 노래들,(빔 벤더스는 대역배우를 기용해 블라인드 윌리 존슨을 재현해낸다) dark was the night,cold was the ground.그의 보틀넥 슬라이드 기타 보다도,그가살아갈 수밖에없었던삶,dark하고 cold한 세계에 대한 그의관점이 느껴진다.이것은 단지그의 인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당시의 미국 흑인의 삶,그 처절함이 저절로 우러나온다.깡통 속에 떨어지는 동전들의 짤그랑거리는 소리야말로 그들의 삶이었던 것이다. 노래는 사실 이런 슬픔이다.작년 부산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천국에 간 비올레타의 전설적인 칠레 포크 가수비올레타 파라는 인생은 파티가 아니라고 말하며삶이 파티일 수 없었던인생들을 향하여 노래를 부른다.사실 그렇다.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걸그룹 출신들의 아이돌 가수들이 노래하는 귀엽고 화려한 퍼포먼스들이 아니다.때로는 춥고 때로는 어둡다.블라인드 윌리 존슨의 노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삶을 노래했다.그리고 또 그는 말한다. Ive traveled in different countries, Ive traveled foreign lands
Ive found nobodycould tell me, what is the soul of a man
what is the soul of a man
what is the soul of a man 아내와 함께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던 그는 자신의 삶을 노래로 표현하며,도대체 한 사람의 영혼이란 어떤 것이냐라고 얘기한다.블루스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숱한 변형을 거쳐 팝 음악의 뿌리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음악이,바로 저런 식의 목소리,삶 자체에서 비롯된 의문을 듣는 사람의 내면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고통과 고난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질문,갉아먹혀지는 영혼의 신음,그것이 바로 블루스다.. 블루스란 언제나 인간을 향하여 질문을 던졌다.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대변했다.(그런 의미에서 바로 그러한 노래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우리나라 음악의 앞날은 엄청나게 어둡다..) 블라인드 윌리 존슨의 장이 끝나자,로렌스 피쉬번의 목소리가 연기하는 윌리 존슨은 다음 뮤지션인 스킵 제임스를 소개한다.그의 이름 skip처럼 스킵 제임스 역시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았다.한때는 운이 좋아 노래를 레코딩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적도 있었지만,그것 역시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음반 회사의 파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널리알릴 기회를 놓쳐버렸다 빔 벤더스는 바로 그 이야기를 영화 속에 재현해 놓았다.마치 내레이션이 끼어들어간 무성영화처럼 진행되는 이 시퀀스에서,스킵 제임스는 기차를 타고 과거에는 가구공장이었던 음반회사에 도착한다.회사는 그의 낡은 기타를 보고 회사의 기타를 선물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레코딩을 진행한다.노래 제목은 hard time killing floor blues.언제 어디 어느 곳을 가나 hard time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그는 높고 날카로운 보컬로 연주한다. 벤더스는 이때 화면에, 당시의 생활상을 마치 자료화면처럼 끼워넣으며 당대의 현실을 조명한다.목사로 보이는 연설자가 등장해 미국 흑인들의 처지를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벤더스는 이로써,블라인드 윌리 존슨의 시간과 스킵 제임스의 시간 사이의 차이를 설명한다.개인적 괴로움이 인종적 괴로움으로 변한 것이다.대공황의 현실 속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던 사람들이야말로 거의 떠돌이 홈리스 상황 속으로 밀어넣어졌던 것이고,바로 그 상황을 초기 블루스가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델타 블루스의 시작은 이런 것일 수도 있었다,라고 그는 스킵 제임스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스킵 제임스는 그 후 몇십 년 동안이나 음악 일선에서 사라진다.침례교 목사의 삶을 살았다,아니면 그냥 떠돌이 전도자였다,하는 얘기가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고 1960년대 옛 블루스들이 재조명될 때 그는 다시 블루스 씬에 불리워지고 몇 년의 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후 암으로 죽는다..그의 인생은 매우 여러번의 skip이었던 것이다. 빔 벤더스가 마지막으로 다루는 블루스 뮤지션은 J,B.Renoir다.이 사람 역시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뮤지션으로서의 인생을 살긴 했지만 농장 일꾼과 접시 닦이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국 남부를 떠돌아야만 했다.(그가 죽었을 때의 직업 역시 접시닦이였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앞서의 두 사람과는 조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적어도 무대에서의 그는 엄청난 쇼맨쉽을 가지고 있었고 일부러라도 화려한 의상을 걸쳤다.고통받는 게인적 영혼만을 노래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발언을 노래로 아끼지 않았다.심지어 그의 첫 노래는 한국전쟁을 다룬 반전 블루스 korea blues (1951년 발표)였다.이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vietnam blues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르누아르는 이렇게 말했다.블루스란 가장 낮은 땅의 사람들이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외치는 노래들이라고.그는 낮은 땅 사람들의 대변자를 자처했으며 그런 심정들을 담은 노래들을 계속 발표했다.예의 korea blues나 vietnam blues 역시 미국 권력을 향한 야유의 노래들이었다.그의 첫 노래 korea blues의 노랫말 역시 이렇게 시작한다. -Lord I got my questionnaire,Uncle Sams gonna send me away from here.. 그는 흑인 병사들이 견뎌내야 할 전쟁이 엉클 샘이라고 불리우는 미국 권력의 전쟁으로 보았고,억지로 끌려와 전장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병사들을 낮은 땅의 희생자로 보았던 것이다.그리고 누군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발언해야 한다는,특히 블루스라는 가장 낮은 땅의 사람들의 노래 형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르누아르를 통해,벤더스는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던 블루스 뮤지션의 실체와 그들 음악의 확장을 얘기한다.개인의 고통에서 인종의 고통으로,개인의 괴로움에서 계급의 괴로움으로..벤더스가 생각했던 블루스 음악의 실체는 바로 이러했다..빔 벤더스는 실제로 J,B,르누아르의 팬이었다.그는 특히 르누아르의 Vietnam blues를 좋아했고,영화 내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카산드라 윌슨을 통해서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있다.. 이렇게 이 영화는 초기 블루스의 세 거장 뮤지션을 통해,블루스의 시작과 변화,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을 인상깊게 설명하고 있다. - - 그러나 이 영화를 굳이 내 이백 편의 장면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블루스란 음악 때문이 아니다.영화란,그런 식으로 망막 뒷편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영화를 볼 때의 관객의 상황과 밀접한 감성으로 연결되어야만 관객의 두뇌에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나는 이 영화의 블루스를 통해서 인간이 처한 상황과 고통,그리고 그 감각적인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의지를 보았다.블라인드 윌리 존슨이 인간의 영혼이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질 때,그는 걸인 뮤지션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서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자체에 의문을 던진 것이다.또한 그 질문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의문이자 질문이다.그래서 그것은 또한 탈출에 대한 의지로서 작용한다.스킵 제임스가 자신의 종족이 처한 hard time killing 상황에 대한 슬픔을 읊조릴 때,그것을 듣는 그의 종족들 역시 스스로에 대한 고통을 위로하고 인식하며,더 이상 그러한 고난의 세계에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듣는다..j.b.르누아르가 당대 미국 사회의 모순에 대해 직접적인 의문을 던질 때,그것을 듣는 모든 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땅과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대해서,더 이상 그런 식으로 우리를 압제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내면의 의지를 바깥으로 던져내게 된다.또한 이것 역시 현재에서 탈출하여 더 살 만한 땅으로 옮겨가고 말겠다는 내면의 다짐이 된다. 즉 그들 모두는 모순적 현실에서 벗어나려 했다.블루스 음악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그저 슬픔만을 표현했던 음악이라면 이토록이나 영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또다른 세계로의 방향성이라는 대명제가 이 음악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내가 그랬다.이 영화를 인터넷에서 찾아내어 밤마다 영화를 보던 그 때-그러니까 내가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 때(그러니까 skip할 때)- 나 역시 나를 둘러싼 모든 현실에 힘겨워하고 있었다.설마 미대륙의 노예출신 같지는 않았다 할지라도,나는 도대체 내가 왜 이 나라에 다시 돌아와 이러고 있는지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었다.게다가 나는 그 당시 나를 둘러싼 조그만 디테일들에 조차 화가 나 있었고,그에 대해 현명한 환멸이나 고전적 체념이라는 방법을 찾아낼 정도로 세련되어 있지도 못했다.(뭐,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또 나는 당시의 내게 주어진 삶의 방법론에 근본적으로 구토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펼쳐질 영원한 권태에 치를 떨고 있었다.그러나 그때 이 영화,그리고 블루스라는 음악이 나타났고,탈출을 향한 비원을 담은 그들의 노래와 연주에 공감섞인 반응을 보였다.그것은 백 잔의 술 보다 훨씬 좋았다.그것은 온 세계의 조화를 지시해주는 클래식 거장들의 교향악 보다 더 나를 위로했다.이 음악이 내 내면에 깊게 작용해 내 정신을 고양시켜주었다는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이 음악 안에 내장된 고통의 힘이 24시간 중 2시간 동안 나를 지탱시켜주고 탈출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삶의 숭고함이라는 대의 명분에 일방적으로 나를 헌납하지는 말자.내 정신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가래덩이들에 유연하게 반항하자.떨어져가는 내 시력에 절망하지만 말고 차라리 가는 눈을 뜨고 조용히 무언가를 얘기하며 살자..라고.. 정신은 다시 균형추를 회복했고 나는 또다시 삶을 살게 되었다.얼마나 그 삶이 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어찌되었든 버티면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떠올릴 때면 나 자신을 향하여 속삭인다. -그렇다,블루스 -고맙다,블루스.. 사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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